HOME > 참여마당 > 언론에 비친 용주사
제목 용주사 중앙선원(中央禪院)
글쓴이 용주사 등록일 2008-11-29
첨부파일 조회수 2083
 

[선원기행]용주사 중앙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전경

 

경기 화성시에 자리 잡고 있는 용주사에 들어서면 다른 사찰과 달리 작은 궁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죽 늘어선 행랑채와 작은 정원, 그리고 누각 형태의 천보루(天保樓) 등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가람배치 때문이다. 천보루란 명칭도 왕궁에서나 쓰이는 이름이다.

용주사가 이처럼 궁궐의 양식을 띠게 된 것은 창건내력 때문이다. 용주사터는 원래 신라말 가지산 선문 2세였던 염거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혜거국사가 거쳐간 갈양사 자리였다. 그러나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있었다. 이 자리에 절을 다시 일으킨 사람이 다름 아닌 조선조의 르네상스를 주도했던 정조였다.

정조는 불행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현 용주사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면서 아버지의 명복을 빌어주는 능사(陵寺)로 이 절을 건립했다. 용주사가 왕궁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용주사는 이처럼 정조의 지극한 효심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지금도 효본찰(孝本刹)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부모은중경탑과 효교육원 등이 경내에 자리 잡고 있어 효심을 되새기기에 그만이다.


중앙선원은 원래 이 궁궐풍의 경내에 있었다. 1969년 청담스님, 월산스님 등 원로 중진스님들이 수도권 내에 선원을 세울 것을 발의하여 이곳에서 개원식을 갖고 첫 동안거 결제를 가진 것이 시작이었다. 중앙선원이라는 명칭 속에는 중심선원이 되어 선풍을 드높이자는 스님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이후 선원은 75년까지 지속되다가 전강스님 입적 후 한때 소원해졌으나, 83년 정대스님이 부임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2003년 입적한 정대스님은 용주사 주지를 세번 연임하는 동안 용주사의 선풍을 진작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수좌들이 더욱 치열하게 정진할 수 있도록 선원을 경내 뒤편 한적한 곳으로 옮긴 것도 정대스님이었다.

스님의 원력에 의해 86년 새로 건립된 중앙선원은 대웅보전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송림이 병풍처럼 선원을 감싸고 있어 한적함과 싱그러움을 동시에 주고 있다. 언뜻 보면 대웅보전 바로 뒤처럼 보이지만 각도상으로는 대웅보전과 약간 비껴서 건물이 서 있다. 선원을 지을 당시 부처님을 모신 본전 바로 뒤에 건물을 짓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어 그렇게 지어졌다는 얘기가 있다.


20평 정도의 선원은 수좌들이 모여서 참선을 하는 큰 방을 중심으로 모두 다섯 칸의 방이 있어서 수행과 휴식을 하는데 모자람이 없다. 올 하안거에도 전국에서 모여든 16명의 수좌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중앙선원의 특이한 점 하나는 입적한지 30여년이 지난 전강스님을 계속 조실로 모시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도 선원의 직책과 이름을 올리는 용상방에는 조실 자리에 ‘故田岡大禪師’가 올라가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전강스님의 상좌로 선원장을 맡고 있는 송담스님이 당신 생존까지는 전강스님을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미 입적한 스님을 ‘살아있는’ 조실로 모시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선원의 선기를 확고히 한 스님은 전강스님이다. 혜월, 용성, 만공, 한암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에게 인가를 받은 스님은 25세 때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고 33세 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의 조실을 시작으로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했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조실의 반열에 오른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과 교류하면서 숱한 법거량을 남겼는데, 나는 그 중에서 만공스님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을 당시 나눈 거량을 가장 좋아한다.


옛 조사의 공안을 낱낱이 깨친 것을 확인한 만공스님은 스님 곁을 떠나려고 하는 전강스님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진다. “부처님은 계명성(啓明星)을 보고 오도했다는데, 저 하늘의 가득한 별 중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전강스님은 이 질문을 받고 곧바로 엎드리며 허우적 허우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한다. 그러자 만공스님이 “옳다. 옳다”라고 인가한 뒤 곧바로 전법게를 지어준다. 세속인이 선사들의 깨달음의 경지를 어찌 알랴만, 이 법거량은 왠지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어느 것이 자네 별인가”라는 질문에 담긴 다분히 시적인 분위기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래에도 있듯 밤하늘에 별을 보면 누구나 물어보지 않던가. “저 많은 별들 중 어느 별이 내 별일까?”라고.


전강스님은 1975년 자신의 몸을 화장한 뒤 사리를 수습하지 말고 재를 서해에 뿌릴 것을 당부한 뒤 좌탈입적했다. 어느 것이 자네의 별인가 라는 질문에 허우적 허우적 땅을 헤집는 시늉을 한 스님의 마지막다웠다.

 

〈이홍섭/문학평론가〉

경향신믄 기사입력 2004-09-09

용주사 범종 모형을 받은 김연아 선수
월암당 정대 대종사 5주기 추모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