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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기일보] : 용주寺와 도시개발
글쓴이 용주사 등록일 2008-07-02
첨부파일 조회수 1832
용주寺와 도시개발
[경기일보 2008-6-16]

오래된 것에는 세월이 담겨 있다. 세월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사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숨결이 묻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수원 인근 화성에 있는 용주사는 오랫동안
우리의 삶과 함께 한 자취가 묻어난 곳이다. 그래서 늘 찾고 싶은 절이다. 그래서 일까.
예로부터 유명한 문인들이 용주사를 찾아 머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만해 한용운이나
조지훈이 일본강점기 시절 잠시 머물며 많은 글을 남겼다. 조지훈은 시 ‘승무’를
용주사에 머물며 썼다고 전해진다.
용주사는 신라 9세기 경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절이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소실되고, 22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새로이 지었는데,
용주사라는 이름으로 재창건하였다. 당시 정조는 꿈에 용이 여의주가 물고 승천하였다고
하여서 용주사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조는 양주에 있는 아버지 묘를 화성으로 옮겨 모시고 현륭원(융릉)이라 하였다.
그리고 용주사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하기 위한 의식이기도
했지만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용주사가 있는 것이다.
한 나라의 임금이 효를 위해서 왔던 곳 용주사, 이곳은 그 이후로 효의 표상처럼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곳은 단순한 사찰 이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런 사찰 용주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필자가 도청 행사로 치매미술치료 행사와 함께 페이스페인팅을 통해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주는 일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용주사에 계시는 관계자 한 분을 만났다. 그 분의 부탁으로 용주사에서 석가탄신일에 맞추어
미술치료 선생님들과 페이스페인팅 행사를 하면서, 용주사 정호 주지 스님을 뵐 수 있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용주사는 오랜 시간과 함께 묻어나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졌다. 용주사를 방문하여 주지 스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보람이거니와 무언가 일상을 벗어나 세상살이에 대한 성찰을 얻게 되는 보람도 커다란 기쁨이었다.
그런데 그런 용주사, 세월도 비켜 가는 그런 곳에도 도시개발의 바람이 불어닥친 것일까.
예전에 찾아와 본 용주사는 푸른 들녘을 지나 멋진 아름드리 나무들로 둘러싸인 길을 따라 다가갈 수 있는 호젓한
곳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용주사는 사찰 입구부터 기다란 펜스가 놓여 있다. 용주사에 이르는 길을 따라 좌우로 건물을 짓는
개발논리가 문화 유적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사찰 바로 앞에 들어선 건물이며 아파트 단지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일이었다.
효 문화 도시 수원, 그리고 화성, 정조의 능 행차 등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담겨 있는 용주사라는 문화적 유산이
커다란 철제 펜스에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많은 이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닿아서 일까.
얼마전 경기도지사의 방문과 함께 많은 문화 유적지에 대한 훼손 우려의 목소리가 전달된 점이다. 용주사 바로 옆 터는
효와 관련한 문화시설로 변경해 진행하기로 하였고, 용주사 전면의 터는 2층 건물로 제한해서 건물을 짓는 것으로
수정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전의 도시개발 계획에 비해서는 개선된 조치이다.
그러나 실상 문화유적지 앞에 다가선 개발의 논리는 여전히 아쉬움이 크다. 드넓은 들판 앞에 호젓한 길을 따라서
이르는 용주사가 보고 싶다.
오랜 세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담아낸 용주사 그 곳에 우리의 휴식 같은 여유를 보다 크게 느끼고 싶은 것은 필자만의
바람이 아니다. 용주사라는 명 사찰은 우리에게 단순한 사찰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런 소중함을 지켜내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신현옥 치매미술치료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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