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사는 통일신라인 854년(문성왕 16)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로 수원·용인·안양·화성·평택 등 경기 남부 지역12시군에 위치한80여 개의 말사를 관할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후기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중창하고 원찰로 삼았다. 낙성식 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다. 이는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뒤 전국 5규정소(糾正所,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용주사의 가람구성은 창건 이후 지금까지 가람의 구조가 크게 변모하지 않았다.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 석축을 쌓아 네 개의 단을 만들고 각 전각을 배치하였다. 먼저 외삼문이 있는 첫 번째 단, 천보루와 나유타료(승당)·만수리실(선당)이 있는 두 번째단, 대웅보전이 있는 세 번째 단, 그리고 칠성각과 제각이 있는 네 번째 단이 그것이다.
이처럼 네 단으로 나누어진 비교적 평탄한 지형 남북의 직선축 위에 대웅보전과 천보루·외삼문을 정연하게 두고, 대웅보전 앞 중정의 왼쪽과 오른쪽에 대칭으로 "ㅁ"자 형태의 승당과 선당을 천보루와 같은 단에 두고 있으며, 이 승당과 선당을 천보루와 행각으로 연결하여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공간 구성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