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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포커스] 천보루에서 정조(正祖)를 생각하다
글쓴이 용주사 등록일 2008-07-04
첨부파일 조회수 2236

[용주사 문화 읽기 1]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불교를 억압하고 배척했던 조선왕조였지만, 정책적 필요에 따라 왕실 혹은 국가 주도로 사찰이 창건되거나 중건되고 재정의 일부를 지원받는 사례들이 있었다.

실록이나 의궤 같은 왕실의 중요 문서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소임을 부여받은 사찰이 있었고, 산간오지의 군사적 요충지나 산성의 방비를 책임진 사찰들이 있었으며, 왕릉의 관리와 보호, 제의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던 능사(陵寺)가 있었다.

조포사(造泡寺)라는 말이 있다.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뜻이다. 왕릉이 있는 곳이 인적이 드문 외진 숲이고 보니 능찰의 주요 소임 가운데 하나가 제를 지낼 때 올릴 제수를 장만하여 제공하였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용주사는 조선 22대 정조임금이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산소를 배봉산(현 서울시립대 뒷산)에서 수원부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이라 묘호를 지어 바친 후 - 현륭원은 훗날 장헌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으로써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 원침(園寢)의 관리와 보호, 그리고 참혹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인근의 갈양사 옛 터에 세운 능침사찰이다.

지난 한 달 사이 세 번에 걸쳐 용주사를 다녀왔다. 용주사는 다소 생경스럽고 독특한 사찰이다. 가람의 배치나 건축물의 구조에 있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절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미리 자료를 숙지하고 갔슴에도 솔직히 처음엔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첫 답사 때 일었던 의문들이 세 번의 발걸음이 있고서야 모두 풀렸으니 시간을 조각내어 번거로운 몸을 끌고 수고한 보람과 기쁨이 있다.

   
1872년에 제작된 수원부 지도 중 일부분.
 

지도 윗부분에 둥글게 그려진 곳이 화성(華城), 아래 중간쯤 산 봉오리들로 빙 둘러싸인 곳이 화산(花山)이다. 가운데 봉오리 아래 현륭원이 있고, 현륭원 왼쪽으로 건릉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용주사가 표기되어 있다.

절이 들어선 곳은 대체로 평탄한 곳이다. 주위로 얕으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서쪽으로 열린 길을 따라 1.7Km 남짓 더 가면 융건릉이다. 절집엔 따로 일주문이 없다.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사천왕을 모신 건물은 80년대 들어와 지어진 것이다.

연풍교에서부터 삼문(三門)까지 이어진 길을 경계로 왼쪽으로는 효행박물관과 야생화 식물원이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은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자라는 제법 넓은 공터다. 수도시설이 있고, 드믄드문 의자가 배치되고, 넓게 그늘이 드리운 부드러운 흙땅은 어른들에게는 넉넉하고 편안한 쉼터요,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에겐 신나는 놀이터다.

   
삼문 밖 공터. 정조 당대엔 임금이 타고 온 가마나 말을 돌보며 말직 호위군사들이 무거운 다리를 풀고 쉬었던 곳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정숙을 요하는 사찰경내지에서 수행 및 각종 의식이 집전되는 주요 전각과 떨어져 상당한 정도의 자유로움과 활동성이 보장되는 이런 공간은 산사이면서도 대도시와 가까운 용주사에 있어 특히 청소년 포교와 관련하여 그 중요도가 매우 높은 곳이다.

   
삼문(三門). 좌우로 긴 행랑이 문 밖과 문 안의 공간을 경계 짓고 있다
 

"절은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소자(정조)는 팔만 사천 법문의 경의(經義)를 베껴 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偈語)를 지어 삼업(三業)의 공양을 본받아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을 짓습니다."

어제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에 나오는 정조의 고백이다. 굳이 치자면 천왕문이나 금강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삼문이 있다. 이러한 삼문 형태는 주로 향교나 서원의 사당, 또는 왕실의 별묘(別廟)에서 볼 수 있다. 재궁으로서의 절의 성격이 삼문에서부터 드러난다.

   
 
 

‘龍珠寺(용주사)’라는 현판이 삼문 가운데에 걸려있다. 일제시대 때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라고 한다. 죽농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과 더불어 우리나라 많은 사찰의 현판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인물이다.

   
천보루. 대웅보전 정면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누각이다.
 

삼문을 지나면 문제(?)의 천보루(天保樓)다. 세 번의 발걸음 동안 대웅보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참배를 올린 것은 세 번째 방문이 있던 날이 처음이었다. 그 동안 마음이 천보루에 묶여 누각 주변만 뱅뱅 돌았던 탓이다.

“하늘이 보호한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가장 먼저 높다랗게 사다리꼴로 세워진 장주초석 여섯 기가 눈에 들어온다. 누하주(樓下柱)가 워낙 짧아 초석이라기보다 돌기둥에 가깝다. 이런 장주초석은 대개 중층누각에 세워지는데, 처마를 많이 빼더라도 건물 자체가 높기 때문에 1층 기둥으로 비바람이 들이치기 마련이라 습기에 의한 기둥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활용된다.

천보루를 보고 경복궁의 경회루를 연상하시는 분들이 있다. 경회루는 사방이 물로 채워진 방지(方池) 위에 세워져 습기의 피해를 보다 많이 입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초석이 아닌 1층 전체를 돌기둥으로 세운 사례다. 장주초석이나 돌기둥은 자재의 비용을 고려해야 했던 탓인지 궁궐이나 위계가 높은 관청건물에 주로 쓰였다.

누각 1층이 대웅보전으로 오르는 통로였던 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걸어가는 이의 시각을 배려한 손길이 눈에 띈다. 우선 중앙 통로인 어칸이 좌우의 협칸이나 퇴칸보다 훨씬 넓다. 측면에도 변화가 있다. 누 아래에서 좌우 옆면을 보면 전면 쪽 첫째 칸이 후면, 곧 대웅보전 쪽 두 칸보다 좀 더 넓은 구조다. 무엇보다 백미는 어칸의 후면, 귀틀 밑 인방을 홍예형(虹霓形, 무지개모양)으로 다듬어 누 아래 1층 계단 밑에서 보면 정면의 대웅보전이 이러한 액자 속에 담기도록 만든다.

   
누마루 아래에서 키를 낮추고 계단 위로 올려다 본 풍경.
 

무엇보다 천보루의 특징은 출입구의 위치와 구조에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누는 출입구가 누각의 옆면이나 후면에 위치한다. 그러나 천보루는 누각 양쪽 끝에 있는 행각으로 들어가서 좁은 목조계단을 통해 어렵게 올라간다. 그것도 ‘전실(前室)’과 같은 1칸 규모의 툇마루를 거쳐 건물 내부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천보루의 출입 구조. 천보루는 후대에 덧붙여진 것으로 알려진 `홍제루(弘濟樓)`라는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내부로의 진입을 매우 조심스럽게 유도한다는 특징이 있다.
 

건물 내부로의 진입이 쉽지 않으며, 좌우 출입구의 행각은 그대로 각각 승당(나유타료)과 선당(만수리실)의 내정으로 통한다. 천보루는 왕이 행차 했을 때 임시 행궁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된 곳이다.

   
화산용주사상량문
 

누각 내부의 모습은 어떨까? 천보루는 각종 법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누각 한 켠에 잉어를 닮은 목어가 달려 있고, 정조의 개혁정치를 보필했던 당대의 실력자 번암 채제공이 쓴 ‘화산용주사상량문’이 판각되어 전면 가운데에 걸려있다. 보(褓)마다 양면엔 용이 여의주를 어르며 구름 속을 날고, 사방을 빙 둘러 빗천장에도 여의보주를 입에 문 봉황과 학이 구름 위를 날고 있다. 용이 구름 속에서 학과 교합하여 봉황을 낳았다고 했던가. ( 그런데 이 말의 출처가 어디지? @@~~~... )

   
 
 

   
천보루 보(褓)의 용문(龍紋).
 

능사를 지어 낙성식을 앞두고 정조는 꿈을 꾸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 용주사라는 사명(寺名)은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데 건물의 완공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것이 낙성식(落成式) 아닌가. 상량(上梁)이란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은 다음 마룻대를 올릴 때 새로 짓는 건물에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음식을 갖춰놓고 지신(地神)과 택신(宅神)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채제공의 상량문(上梁文)에 이미 용주사라는 사명이 등장한다. 용(龍), 즉 왕이 되지 못하고 붕당정치에 비참하게 희생당한 아비를 그리는 마음이 ‘승천(昇天)’의 꿈을 낳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절 이름은 정조 자신이 지었을 것이고...

정조는 왕조의 마지막 황금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한 개혁군주였다. 정통 사가들조차도 태종이 다져놓은 탄탄한 기반 위에 화려한 문치를 꽃피웠던 세종보다는, 사림의 반발과 정적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딛고 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정조의 통치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견해가 많다. 그는 황극(皇極) 사상의 이념적 바탕 위에 성왕(聖王) 정치의 실현을 꿈 꾸었던 사람이다.

정조시대가 건져 올린 숱한 영광의 성취들은 다양한 계층의 백성을 끌어안으려 했던 국왕 정조의 지극한 애민(愛民)정신의 산물이다.

   
대웅보전의 용두(龍頭). 
 

창방과 직교하며 기둥머리에서 빠져나와 평방과 주두, 또는 주두와 도리까지 감싼 부재를 안초공(按草栱)이라 한다. 화재에 취약한 사찰건축에서 대웅전 건립 시에 벽사의 의미로 용두형안초공이 많이 장식되었다.

   
주심포 짜임. 그림 출처, 「목조건축의 부재와 결구」, 김동현/유문룡, 중앙일보 계간  美術.
 

불교의 상징 도상에서 마니주, 혹은 마니보주라고도 불리는 여의보주는 자비의 화신이신 관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의 지물로 표현된다. 보주(寶珠)가 중생을 빈곤과 고난에서 구하고 병을 낫게 하며 악을 제거하는 능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네 무의식 속에서는 여의보주가 보살의 지물로서보다 용의 지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여의주 없는 용’이라는 속언이 있다. 아무 쓸모없이 되어버린 일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부르며 천변만화(千變萬化) 하는 용의 신통력은 여의주가 있어야 가능하다. 여의주가 없는 용은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다. 정조에게 여의주는 어떤 의미였을까?

용은 왕권의 상징이다. 용에게는 특별히 치수(治水)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농경민족에게 있어 기후를 조절하고 물을 다스리는 존재는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절대능력자다. 하여 위대한 왕이나 영웅은 곧잘 용에 비견되었다. 제왕이 입는 옷은 용포(龍袍)라 했고, 그 얼굴은 용안(龍顔)이라 했으며, 그가 앉는 자리는 용상(龍床)이었다.

용은 순환하는 존재다. 하늘과 바다와 지상, 우주의 세 영역을 넘나든다. 그것은 지상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강물과 바닷물이 퍼지고 날아올라 구름이 되며, 구름이 다시 비가 되어 지상에 흩뿌려지는 원리와 같다.     

이 순환의 작동 원리에 이상이 생기면, 즉 자연의 질서가 깨지거나 균형을 잃게 되면 땅과 그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중생들은 온갖 재해를 입게 되어 가난해지고, 병을 앓게 되며, 황폐해지고 악해진다.

   
대웅보전 앞의 정료대(庭燎臺). 서원이나 향교의 사당 앞에, 혹은 강당 마당에 두어 밤에 제사를 지낼 때 관솔불을 피울 수 있도록 했던 석물이다.
 

“용왕의 왼쪽 귀 속에 하나의 마니여의(摩尼如意) 보배구슬이 있을 것입니다. 가셔서 구하십시오. 만약 이 구슬을 얻으시면 염부제에 가득히 갖가지 보석과 의복, 음식이며, 의약, 음악, 광대들을 비처럼 내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대로(如意) 되는 보배구슬이라 부르는 것이니, 태자께서 만약 이 구슬만 얻으신다면 반드시 당신의 본래 소망을 이루시리이다.” ¹본연부 경전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제4권 '악우품(惡友品)'에서.

   
대웅보전 내부 닫집 아래에 떠 있는 여의보주.
 

여의주는 신주(神珠)다. 여의주는 만파식적이다. 여의주는 율려(律呂)다!

지난 달포 동안 정조에 관한 사료와 서적들을 꼼꼼히 정독하며 나는 “한 가지 명령이라도 혹시 민지(民志)를 꺾을까 염려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혹시 민력(民力)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던 정조에게 있어 용의 '여의주'란 ‘치국(治國)의 도(道)', 치자(治者)의 도리를 의미하는 것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가고자 하였으나 끝내 가지 못한 길, 그 아비의 몫까지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으리라. 아버지의 산소를 찾을 때마다 그는 그가 나아가야 하는 길의 방향을 아비에게 묻고 또 물으며 스스로를 다졌을 것이다.

   
석루조(石漏槽). 떨어져 있는 각 전각은 거미줄처럼 이어진 수로에 의해 하나로 묶여진다.
 

석루조는 모아져 내려온 빗물을 축대 아래 수로로 흘려보내는 기능을 한다. 생긴 모양이 종묘 영산전의 것과 흡사하다.

임종을 앞두고 한 달여 가까이 정조의 지병은 까닭 모르게 악화되어 갔다. 살속으로 파고들어 내장을 상하게 하고 뼈를 삭게 하는 종기였다. 그가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동안 조정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론벽파의 딸 왕대비 정순왕후의 손에 들어갔다. 세자의 나이 겨우 열 한 살. 무기력감과 싸우며 엄습해 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두 손에 움켜쥐고 캄캄한 침전에 홀로 앉아 외로움과 좌절로 전율했을 한 사내를 생각한다.

재위 24년, 마흔 아홉의 이 영명하기 그지없는 군주는 군주로서는 너무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의 죽음은 그가 꿈 꿔 왔던 모든 일의 중단을 의미했다. 그가 아꼈던 신진관료들은 뿌리 뽑혀 나갔고,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조선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칙칙한 미궁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구현하고자 했던 ‘꿈의 도시’ 화성(華城)은 하나의 지방 도시로 전락해 갔다.

   
용주사 동종의 용뉴.
 

꿈은 사라졌다. 현재 수원 화성은 왕이 몸소 행했던 효(孝)만이 강력한 이미지로 남아 ‘효의 도시’로 탈바꿈 해 있다. 들보의 용이 꿈틀거리며 살아나듯, ‘효’에 갇힌 정조의 꿈은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침체된 불교계를 자극시킬 혁신과 중흥의 바람이 용주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련 ecobamb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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