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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용주사 등록일 2011-02-01
첨부파일 조회수 1861
정조의 효심이 어린 융릉의 능사
[테마여행] 용주사(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글·사진=신성순 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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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는 홍살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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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건물이지만 밖에서는 천보루, 안쪽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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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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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0호인 용주사 범종을 보관하고 있는 범종각.

 

 
854년(신라 문성왕 16년)에 세운 고찰 갈양사(葛陽寺)는 한동안 번창했으나 952년(고려 광종 3년)에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폐사 상태로 800여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부친 사도(장헌)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을 화산으로 옮기고 나서 1790년 갈양사 자리에 능사(陵寺)로서 용주사를 세우고 부친의 명복을 빌었다.

당시 이 사찰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시주 8만7천 냥을 거두어 보경(寶鏡)이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龍珠寺)라고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창건과 동시에 팔로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으며, 보경에게는 도총섭이라는 직함을 주고 이 절을 주재하도록 했다.

용주사로 들어서면 우선 홍살문이 눈길을 끈다. 본디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운 문으로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우고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신 호성전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대갓집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끄는 천보루

삼문을 지나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큰 규모의 누각이 정면으로 보인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天保樓)로 1790년 창건 당시 지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이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 여섯 개의 목조기둥 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다.

천보루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는 나유타실, 서쪽에는 만수리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사찰 건물이라기보다는 흡사 대갓집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천보루를 지나 뒤돌아보면 홍제루(弘濟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같은 건물이지만 밖에서는 천보루, 안쪽에서는 홍제루라고 불리는 점도 특이하다.

천보루 앞에 서 있는 세존사리탑은 높이 4m의 오층석탑으로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졌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1702년 성정 스님이 부처의 진신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이 석탑에 안치했다고 한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57평 규모로 팔작지붕을 얹고 있으며 장중한 위엄을 풍긴다. 창건 이후 1900년, 1931년, 1965년, 1987년에 보수 및 개축했으나 창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대웅보전 안의 후불탱화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하루 여섯 번 재를 올린 호성전

대웅보전 옆에는 호성전이 있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 형식으로 지은 전각으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날마다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하루에 여섯 번이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의 위패를 차례로 모셨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었다. 호성전은 1950년 한국전쟁 때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화성시는 융건백설, 용주범종, 제부모세, 궁평낙조, 남양황라, 입파홍암, 제암만세, 남양성지 등 여덟 명소를 화성팔경으로 꼽고 있다. 그중에서 제2경인 용주범종은 용주사가 품은 범종을 가리킨다. 1964년 3월 30일 국보 제120호로 지정된 용주사 범종은 높이 1.44m, 입지름 0.87m, 무게 1.5톤에 이른다. 보기 드문 거대한 동종으로 우리나라 종의 양식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다.

몸통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조성했다고 새긴 글이 있지만 이 글은 후대에 쓴 것으로 종의 형태와 문양이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고려 전기의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용통에 약간 금이 가고 유두가 부서졌으나 그 외에는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며 조각 수법이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1979년 12월 11일 천연기념물 제264호로 지정된 용주사 회양나무는 수령 3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다. 나무높이 4.6m, 가슴높이 줄기둘레 53cm이며 3∼3.6m로 가지가 퍼져 있다. 이 나무는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할 때 손수 심은 기념수라고 전해진다.

연평도 포격·구제역 대혼란은 共業…공동체의식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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